'2018/04'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8.04.24 초보자분들을 위한 나의 기초훈련방법 소개 (8)
  2. 2018.04.18 #ME TOO #WITH YOU_가해자에게 말합니다.
  3. 2018.04.17 #ME TOO #WITH YOU

초보자분들을 위한 나의 기초훈련방법 소개


종종 방문객 분들이 “그림을 처음 시도하는데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모르겠다” 혹은 “이것 저것 그리고 있지만 나의 부족한 점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고민이다” 하는 질문을 합니다. 그래서 제가 초기에 그림에 대해 접근하고 훈련했던 방식에 대해서 간단하게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알려드리는 내용은 몇 년 동안 그림에 손대본 적이 없었던 제가 대학 졸업과 동시에 최대한 빨리 컴퓨터 작업에 익숙해지고, 최대한 빨리 취업하기 위해 계획하고 실행했던 기초훈련방법입니다. 저는 눈-두뇌-손을 기준으로 해서 각 훈련마다 어떤 감각을 단련하려고 하는지를 설정했습니다. 목표로 하는 감각을 강화시킬 수만 있다면 그리는 시간, 양, 퀄리티와 같은 구체적인 목표는 각자가 알아서 정하시면 됩니다. 방법들이 특별한 것은 전혀 아닙니다. 다만 감각을 나누어 훈련한다는 개념은 저의 부족한 점을 채우는데 좋은 효율을 보여주었고, 독학파로서 그림에 대한 기준을 세우는 데에도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만약 깊이가 있거나 전문성 있는 그림을 원하신다면 여기에 추가적으로 더 깊고 넓은 공부가 필요할 겁니다. 예를 들어 게임원화가가 되고자 하는 분이라면 이러한 훈련을 하면서 동시에 게임 원화와 일러스트의 차이, 디자인 원리, 복식, 무기, 상징과 기호학, 색채학, 재질감 등등등을 추가로 함께 공부하셔야 합니다. 언젠가 이런 부분들도 차차 설명드릴 기회가 온다면 좋겠네요.


이 글을 다 읽으시고 대략적으로라도 ‘아 이렇게 하면 할 수 있겠다,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다’하는 기분이 드신다면 기쁠 것 같습니다.


 


1. 그냥 그리기 (손 근육 강화)


아무 생각 없이, 아무 목적 없이, 아무거나 그려봅시다.

그림 그리는 것이 신체를 이용하는 활동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림을 그리는 데에 필요한 근육이 없는 상태에서는 당연히 원하는 대로 그림을 그릴 수가 없겠죠. 살면서 지금까지 딱히 그림이란 걸 그려본 적이 없다면, 먼저 큰 욕심 없이 근육부터 만드시는 것이 좋습니다. 완성된 형태의 그림이 아니더라도 직선, 곡선, 동그라미, 세모, 네모 등 간단한 형태를 반복해서 그리셔도 좋고, 대단한 그림을 그리겠단 마음을 버리시고 낙서하듯 손 가는 대로 이것저것 그려보시면 됩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많이 그려볼수록 빨리 근육은 생겨납니다.

아무 목적 없이 그릴 때 나오는 것들은 때론 본인의 현재 상태를 알려주는 지표가 되기도 합니다. 반복해서 특정 소재를 그리고 있다거나, 사람을 그릴 때 특정 부분까지만 그리고 더 이상 그리지 않는다거나, 혹은 백지만 보면 머리가 하얘지는 경우도 있죠. 자연스러운 상황에서 자신의 상태를 인지하는 것은 중요한 지표가 되어줍니다. 단순히 부족한 능력은 키우면 되지만, 때론 심리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그림을 있는 그대로 살펴보고 파악하는 습관은 장기적으로 스스로가 가야 할 방향을 정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겁니다. 본인이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서 쭉 가져가거나, 반대로 그 외의 소재들을 그려보거나, 그리지 못하는 인체 부위에 대해 연습을 하거나, 망설임이 생기는 작업에 대해서 보강해야 할 부분을 고민해보거나 하는 식으로요.


제가 타블렛을 사고서 초기에 그렸던 그림들을 몇 장 가져와봤습니다. 어떻게 써야할지 몰라서 그냥 손 가는대로 그렸던 기억이지만, 그래도 한 장 한 장 쌓일 때마다 재밌었던 기억이 나네요. 

    



2. 보이는 대로 그리기 (눈-손 연계 강화)


이 연습은 크로키, 사진모작, 연필소묘(석고상이든 뭐든 눈에 보이는 것 다 가능), 잡지떼기 등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할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정확히 똑같이 보고 따라 그려봅시다.

이 훈련은 관찰력을 키워주고, 그것을 옮겨내는 손의 연계를 훈련시켜줍니다. 수채화를 처음 접한다거나, 목탄을 처음 써본다거나, 컴퓨터 작업을 해본 적이 없어 모니터의 색감과 타블렛에 적응이 필요할 때에도 좋은 연습이 되어줄 겁니다.

초기에는 가급적이면 다른 작가의 눈으로 한번 해석해서 그려진 그림들을 모작하는 것보다는, 실물이 담긴 사진을 모작하는 편을 추천합니다. 다른 작가의 눈으로 한번 해석을 거친 것들은 이미 생략과 과장단계를 거쳤기 때문에 그 특징만 따라잡아도 제법 비슷해 보여서 실력이 금방 늘어난 것으로 착각하기 쉽고, 때로는 많은 디테일이 생략되어 있어서 본인에게 필요한 관찰력을 키우는 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직접 관찰하고, 해석하고, 옮겨 그리는 것을 충분히 연습한 후에 필요에 따라 작가들의 작품을 모작한다면 더 효율적으로 좋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제일 처음에는 ‘눈에 보이는 모든 디테일을 다 옮겨 그리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어렵고 오래 걸리겠지만, 이 단계를 충분히 거치고 나면 그림을 효율적으로 그리는 단계나 보이는 것들 중 무엇을 빼고 넣을지에 대한 취사선택이 가능해지므로 장기적으로 자신의 그림 스타일이나 작업과정 흐름을 만들어내는데 스스로 판단이 서게 됩니다.

어느 정도 스스로 자부할 만큼의 실력을 가지게 된 후에도 눈-손의 연계 상태를 수시로 체크하고 조율해주는 편이 좋은데요, 가끔 한참 쉬다가 다시 그림을 그릴 때 왠지 마음대로 손이 움직여지지 않을 때에도 이 연습은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저는 눈-손 싱크가 쉽게 둔해지는 편이라 손을 쉬어야 하는 날이나 혹은 작업을 하기 전 시간이 날 때마다 꼭 매일 매일의 루틴(반복)연습으로 크로키를 하고 있습니다. 크로키를 한 날과 안 한 날의 작업 효율 차이는 꽤 크게 나는 편입니다.



① 잡지떼기_사물: 목표는 사물을 최대한 그대로 다 그리기

형태를 잡거나, 정확한 색을 집어내는 것도 모두 자신의 눈과 손만 이용합니다. 컴퓨터 툴 사용X

  

② 잡지떼기_사람: 목표는 사람의 얼굴 구조, 옷감 재질에 익숙해지기

이때는 디테일의 퀄리티까지 완벽하게 표현한다기 보다는, 사람의 형태에 익숙해지는게 목표였습니다.

똑같은 잡지떼기를 하더라도, 자신이 목적한 것을 찾아서 그 목표만큼만 익히셔도 무방합니다.

   


③ 사진모작: 목표는 자연광에 따른 색 변화 관찰하기

어렴풋이 공간을 지배하는 색에 따라 그 공간에 속한 사물 / 인물의 색도 함께 변화한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이건 지금까지도 많이 어려운 부분이네요. 이 연습은 다시 시작해야겠습니다.

  

  


④ 사진모작응용(영상 정지 화면 모작)

사진은 정지된 그 한 장을 위해 과장되게 수정하기도 합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상대적으로는 날 것의 빛 세팅, 혹은 정지된 포즈가 아닌 움직이는 사람의 동세를 관찰할 수 있습니다.

혹은 영상에서 특정 분위기를 전달하기 위해 잡은 구도와 연출을 배워올 수도 있습니다.


  


⑤ 동물, 곤충 모작

캐릭터원화가가 사람만 그리는게 아니라는 걸 알고 나서부터 시작했습니다. 

기존의 다양한 생물체들의 모습을 알고 있다면 응용하기도 쉬워질 거라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⑥ 크로키

크로키는 사실 이 다음에 소개 될 기본기 연습과 눈-손의 싱크를 맞추는 모작 연습의 중간 지점입니다.

하지만 저의 경우는 눈-손 연계를 강화하는 훈련으로 쓰고 있으니 여기서 먼저 소개드리겠습니다.


크로키에서 저의 목표는 정확도보다는 정해진 시간 내에 최대한 빨리 인간의 동세를 잡아내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손이 자주 버벅댄다거나, 혹은 어떤 동세인지 빠르게 캐치해내지 못 한다거나 하는 스스로의 상태를 점검합니다. 


저의 경우 별다른 일이 없다면 거의 매일 개당 30초씩 40개(총 20분)의 크로키를 합니다. 

참고하는 사이트는 포즈마니악(http://www.posemaniacs.com/thirtysecond)이라는 곳입니다. 

정해둔 시간마다 자동으로 셔플하고, 소리로 알려줍니다.


  

 


제가 했던 연습들을 보면 아시겠지만, 그때 그때 저에게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채울 수 있는 것들을 찾아서 모작했습니다.

여러분도 지금 자신에게서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 그걸 채우려면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3. 세상 이해하기 (눈-두뇌 강화)


기본기 훈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실제 세상에 대한 이해’입니다. 이미 존재하는 세상에 대한 깊은 이해를 거치고 나면, 별다른 자료가 없더라도 자유로이 실재하는 것처럼 표현해낼 수 있는 거죠. 실제처럼 사물의 크고 작음 / 가까움과 멈을 표현하기 위해 ‘투시’를 공부하고, 인체의 각 부위가 어색해 보이지 않도록 ‘인체해부학’과 ‘크로키’연습을 공부하게 됩니다. 간혹 필요에 따라 ‘색채학’을 공부하기도 하고, ‘빛 표현’을 여러 레퍼런스를 찾아다니며 공부하기도 합니다.

제가 ‘이해’를 강조한 이유는, 때때로 레퍼런스를 똑같이 베껴 그리는 것만으로 훈련이 충분하다고 착각하는 경우를 자주 보기 때문입니다. 이해를 건너뛰고 레퍼런스를 똑같이 그려냈을 때, 그 내용이 그 사람에게 남아있을까요? 연습 시간과 그려낸 양으로 충분히 훈련했다고 착각하기 쉽고, 정작 자기 작업에서는 답답한 기분을 느끼게 될 겁니다. 근육에 저장된 기억만으로 깊은 이해를 커버하기엔 빈약합니다. (저도 이 부분을 나중에서야 깨달았고, 기본기 훈련을 반복하면서도 항상 부족하다고 느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뼈 아프네요...)

물론 이해되지 않는 수학공식을 처음 접할 때에는 무조건 받아 적고, 반복적으로 쓰는 것이 기억에 도움이 되긴 합니다. 만약 자신이 이해력이 떨어지는 편이라면,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횟수로 반복해서 베껴 그리고 통으로 외우세요.

기본기 훈련은 그림체를 가리지 않고 모두들 중요하다고 많이들 얘기합니다. 기본적으로 우리 눈에 세상이 어떻게 보이는지의 원리를 이해하지 않으면 자신의 그림에서 의도치 않게 틀린 부분이 있어도 ‘이상하다’고만 느낄 뿐 ‘어디를 고쳐야 할지’는 알 수 없게 되고, 결국 자신의 의도와 다른 것을 보여주게 되죠. 어느 정도까지 깊이, 자세하게 이해를 할 것이냐는 개개인의 관심사에 따라 분명 많이 다를 겁니다. 자신이 어느 정도의 이해를 해두어야 원하는 만큼 표현할 수 있을지 스스로 많이 고민해보시면 좋은 답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① 투시

사실 초중고의 미술시간에도 간단하게 배우는 내용입니다.

원근법이란 평면상으로 입체가 느껴지도록 하는 방법들을 말하는데, 중첩, 공기원근법, 선 원근법 등이 있습니다.

선 원근법은 소실점에 따라 1점 투시, 2점 투시, 3점 투시로 나뉩니다.

자세하게 들어가면 투시가 적용된 원을 그리는 법이나, 멀어지는 거리 상으로 동일한 거리를 재는 법 같은 것들도 있습니다. 

투시의 경우 배경쪽 작업을 하시는 분들에게 많이 강조되곤 하지만, 

인물이나 사물도 공간에 속하기 때문에 입체적인 그림을 잘 표현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투시를 잘 익혀두시는 편이 좋습니다.


② 인체해부학

인체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고, 어떤 구조로 되어있는지에 대한 공부입니다.

신체가 어떻게 눈에 보이는 실루엣을 이루게 되는지 이해합니다.


기본 비율, 얼굴의 황금 비율을 기준으로 해서 가장 노멀한 신체 비율을 익히고, 

뼈대의 구조, 근육의 구조를 익힙니다.

기본을 다 익히고 나면 근육이 힘을 줬을 때와 이완됐을 때의 차이나 지방의 정도에 따른 인체 느낌의 차이를 관찰해봅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자라나고, 나이들어감에 따라 생기는 차이를 관찰하고 익혀도 봅니다.

뼈와 근육의 성장, 근육의 감퇴에 따른 뼈의 자세변화, 피부 탄력성의 변화 등을 자세히 관찰해봅니다.


교재는 무엇이 되어도 좋습니다. 세상에는 이미 좋은 책이 많거든요.

혹은 외국의 좋은 영상자료들을 찾아보셔도 좋습니다.

돈이 없고 자료가 마땅찮다면, 인터넷에도 자료가 많습니다. 


기본 책은 가장 유명한 것은 A.루미스(앤드류 루미스), B.호가스 두 분의 저서입니다. 

두 분의 특성은 확연히 차이는 편이라 서점에 가셔서 둘러만 보셔도 금방 아실 겁니다.


저 두 분에 더해서 추천드리는 책은 '포스드로잉'과 '근육운동가이드'입니다.

포스드로잉은 힘의 리듬을 따라 더욱 매력적이고 다이내믹한 포즈를 드로잉을 만들어내는 법을 다룹니다.

말보다, 서점에 가셔서 꼭 한번 살펴보시면 바로 이해하실 겁니다. (해부학보단 동세에 가깝네요. 그래도 참고!)

근육운동가이드는 엄밀히 말하면 운동하는 법에 대한 책입니다만, 일러스트로 이루어져있습니다.

각 포즈와 동작별로 근육이 어떤 형태를 이루고, 어떤 부위에 자극이 되는지 잘 설명되어 있어서

정자세로 서있을 때의 근육이 아닌, 움직일 때의 근육이 어떻게 보이는지 참고하기에 좋습니다.


양이 꽤 많기 때문에 종이로 된 연습장에 주로 연습을 했습니다. 스캔 떠서 블로그에 올린 건 아래 정도 밖에 없네요.


 


③ 색채학

색채에 대한 본질적인 연구를 바탕으로 한 학문입니다.

색채의 물리적인 속성, 인간의 감정과 정서에 미치는 영향, 안료나 잉크같은 화학적 성분에 대한 연구, 색이 전달되는 생물학적 체계에 대한 연구, 그리고 색이 가진 예술이나 미적인 분야에 끼치는 영향 혹은 관련성을 모두 포함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간단하게는 인물의 옷 배색을 어떻게 해야 할지, 그림을 지배하는 빛의 색은 어떤 계열로 할지,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대표하는 색은 각각 무엇으로 정할지 등 색과 관련된 다양한 고민들을 하게 됩니다. 색채학은 이러한 고민들에 대해서 많은 힌트를 줄 겁니다.


컬러리스트란 자격증이 있다보니 교재는 꽤 많이 나와있습니다. 자격증을 딸 필요까진 없지만, 교재는 참고해보시면 좋겠네요.


④ 빛

실제 우리의 눈에 사물이 보이는 것은 빛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광원이 있고, 그것이 사물에 부딪힌 것들이 우리의 눈에 들어오게 되는 것이죠.


광원의 종류, 광원과 사물 표현의 각도에 따라 생기는 명암, 그림자의 영역이 생기는 원리 등을 이해하고 그것을 통해 그림을 그리게 되면 가상의 공간에 가상의 인물or사물을 표현하더라도 마치 실제처럼 보여지게 됩니다. 


가장 좋은 교재로는 제임스 거니의 저서 '컬러 앤 라이트'를 추천합니다. 빛의 종류에 따른 예시도 좋은 그림들로 채워져 있으니 많은 도움 되실 겁니다. 이 책이 한국에 번역돼서 들어온 것이 그리 오래되지는 않아서 정작 저도 아직 제대로 읽지는 못 하고 있었네요. 조만간 꼭 보고, 이해할 예정입니다. 


4. 목표와 의도대로 그리기 (눈-두뇌-손 합동 강화)


보이는 대로만 그리거나, 보이는 것을 이해해서 그리는 단계를 거치고 나면 나의 머릿속에 있는 것을 그리는 훈련을 해야 할 때가 옵니다. 세상에 이미 있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내 그림’을 그릴 단계입니다.

제가 그림 작업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목표 및 의도 설정’입니다. 크게는 자기 자신의 그림세계가 다른 사람의 그림과 어떤 점에서 같고 어떤 점에서 달라야 하는지, 내 그림이 보여주었으면 하는 것은 무엇인지 평소에 끊임없이 스스로 질문하고 답해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작게는 각 그림마다 추상적으로라도 무엇을 표현하고 싶은지, 보는 이들이 이 그림을 볼 때 무엇을 느꼈으면 하는지 설정해두는 것입니다. 이러한 목표와 의도를 설정해두지 않으면 자기 그림인데도 불구하고 습관대로 제멋대로 그려지는 그림들을 보면서 왜 이렇게 표현해버렸는지, 어디를 어떻게 고쳐야 할지 가늠조차 할 수 없을 겁니다. 또한 자신의 약점을 만났을 때 은근슬쩍 피해버려도 티가 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부족한 점을 눈치채기도 어려워집니다.

매 그림마다 목표와 어떻게 보여졌으면 하는지 의도를 정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작업을 하고, 그림이 완성된 후 최대한 객관적으로 얼마나 목표를 달성했는지 체크합니다. 목표가 명확할수록 목표를 이루기 위한 방법들도 구체적으로 고민할 수 있게 되고, 이러한 데이터가 쌓일수록 자신만의 무기가 생기게 됩니다. 지금 내 그림이 얼마나 부족하든지 간에 그림의 장수가 쌓이면 쌓일수록 아주 빠른 속도로 발전하게 되는 겁니다.

시작은 단순하고 소박해도 좋습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퀄리티로 그려본다거나, 하루 한 장씩 완성한다거나, 모작을 사진과 착각할 정도로 자세하게 그려본다-같은 것들입니다.

그렇게 그리다 보면 조금씩 갈증이 생길 겁니다. 캐릭터 원화가라면 특정 시대의 복식을 새롭게 디자인해서 보여준다거나, 만화체지만 리얼한 표현법으로 그려본다거나, 어디에도 없는 기괴한 몬스터를 그려보는 것도 좋겠죠. 게임업계가 아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삽화가라면 보는 것만으로 쓸쓸한 분위기를 표현한다거나, 글 한 페이지 분량의 스토리를 그림 한 장 안에 그려본다거나, 특정질감의 재료로 생경한 느낌을 테스트 해보는 것도 좋을 겁니다.

갈수록 더 디테일한 목표들이 생겨날 겁니다. 현대적인 느낌에 심플한 디자인이지만 흔하지 않은 형태에 보자마자 압도적인 힘차이가 느껴졌으면 한다거나, 도시가 생겨나서 멸망하기까지의 사람들이 공유했던 문화의 상징을 무의식적으로 전달되도록 디자인하여 복선으로 쓴다거나, 명암을 명도의 대비가 아니라 색감의 변화와 채도의 대비를 통해 표현해서 기존의 그림들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형태를 표현해서 나의 아이덴티티를 보여준다거나 하는 식입니다. 디테일한 목표를 가질수록 디테일한 자기만의 방법론들을 찾게 되고, 이것들이 쌓이면 자신만의 무기가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무기는 남들이 쉽게 베낄 수도 없고, 쉽게 무너지거나 사라지지 않습니다.



제가 초기부터 그림을 그릴 때마다 잡았던 작은 목표들과 그 결과물들을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아시겠지만, 저의 목표가 정답일 순 없습니다. 스스로가 원하는 것들을 적어보시고, 실행해보시고, 더 빨리 실패하시고 더 많이 실패하실수록 더 빨리 성공하실 겁니다.


① 일단 일러스트 느낌나게? 한 장 완성해보기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완성된 그림'인 것을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오랜 시간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만 했을 뿐, 연필 낙서 외에는 달리 없었거든요.

일단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있어야 스스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아서 무작정 그려봤습니다.


 


② 자료보지 않고 사람 얼굴 그리기

참고자료가 없는 상태에서 얼마나 사람얼굴을 그릴 수 있을지 알고 싶었습니다만... 네, 이해가 많이 부족한게 보이죠?

목표를 정하고, 해보고, 결과를 체크한 뒤 저에게 부족한 사람 얼굴에 대한 이해도를 채우는 연습을 보강합니다.

얼굴뼈에 대한 해부학, 얼굴 사진 모작 등으로 보강할 수 있겠네요.


  


③ 게임 일러스트처럼 그려보기

사실 이 때의 저는 일러스트와 원화 차이도 잘 몰랐고, 어떤 막연한 느낌만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존 게임의 캐릭터를 한 번 그려보기도 하고, 

디자인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지만 내가 그려보고 싶은 캐릭터를 그려보기도 했습니다.

막연하게 '게임쪽은 이런 느낌의 그림인 것 같아'하고 장님 코끼리 다리 더듬듯 그렸지만, 

그리는 과정에서 제가 어떤 부분에서 막히는지는 알 수 있었고 좋은 단서들을 얻었습니다. 


 

 


④ 하루 한 장 완성하기 

그림 한 장 한 장 그릴 때마다 깨닫는 것은 많았지만, 어느 순간 제 손이 너무 느리다는 자각이 있었습니다.

하루의 절반은 컨셉을 정하고 러프를 짠 뒤, 그 중 하나를 골라 무조건 그날 안에 완성하기로 합니다.

의외로 오래 고민한 작업들과 큰 차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고, 

저 자신이 작업을 진행하는 흐름에 대해서 파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⑤ 랜덤 키워드 스터디

이 연습은 회사에 취직한 이후 했던 연습입니다. 

회사에서는 기획서라는 것이 있고,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컨셉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당시 남자친구였던 남편이 랜덤 키워드 스터디란 걸 해보면 어떠냐 했고, 

엑셀파일에 종족/소품/직업/상징 등 몇 가지 키워드가 튀어나오도록 설정해두고 그 단어들을 최대한 소화해보기로 합니다.

다른 데에서 제시한 키워드들로 작업해도 꽤 흥미로운 작업이 이뤄질 수 있음을 알게 됐고,

오히려 혼자 떠올리는 컨셉들에 비해 더 다양한 것들을 그릴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디자인 코드에 대해 좀더 깊이있는 공부가 필요한 것 같다는 힌트도 얻었습니다.


 

 


⑥ 둔탁한 얼굴 형태감을 좀더 예민하게 다루기

회사생활을 하면서 얼굴 형태감에 대한 얘기를 종종 듣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동세나 디자인 자체에 대해서는 중요하게 생각하고 디테일하게 접근해왔지만,

얼굴 느낌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보강하기 위한 방법을 고민합니다.

선이 가진 오차 때문에 러프스케치 상의 선이 너무 두껍게 되면 그 선 만큼의 오차가 묘사단계에서 발생한다고 가정했고,

최대한 얇은 선을 이용해 러프를 그린 뒤 최종적으로 선을 남기지 않게 완성해보기로 합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개인적으로 많은 성과를 얻은 한 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각 그림마다 적어놓은 목표들은 당시 제가 실제로 그림을 그리기 전에 생각해두었던 것들 입니다. 목표를 확실히 하고, 해보고, 성공하면 뿌듯해하고, 실패하면 부족한 부분을 빠르게 보강합니다. 

그림을 그릴 때의 기분- 아 여기가 막힌다, 내가 여기는 뭉개고 있다, 이 색인 줄 알았는데 탁하게 느껴지는 거 보니 틀린 거 같다 이런 감각들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완성하고 나서 직후에 보이는 것들과 완성하고 나서 한 일주일 후에 보이는 것들이 달라질 수도 있으니 그 부분들도 잘 관찰합니다. 자기자신에게 솔직하고, 또 매 순간 어떻게 느껴지는지를 잘 알고 있다면 스스로가 자신에게 좋은 스승이 되어줄 수도 있습니다.

아주 초기부터 이 원칙에 따라 그림을 그린 걸 보면 제 성향의 영향도 있는 것 같습니다. 블로그를 만들었던 것 자체가 제가 연습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기록하기 위함이었고, 중간 중간에 지칠 때마다 제가 성장해왔던 과거의 그림들을 보면서 많은 힘을 얻었습니다. 그래도 저기서 이만큼 왔구나- 여기서 느끼게 되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더 갈 수 있을지 가끔은 기대되기도 하고요:D



5. 피드백 주고 받기 (타인의 눈-두뇌와 나의 눈-두뇌 연결 : 객관성 강화)


사람은 자기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 누구보다 잘 압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자기 머릿속에 없는 일은 죽기 전까지 모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림을 그리는 것도 사람이고, 사람은 자기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알아채기 어렵습니다. 자기가 아는 것은 반복해서 활용할 확률이 높지만, 모르는 것을 알아채고 익히는 것은 별다른 계기가 없으면 어렵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 내 그림을 보여주고, 그들이 느낀 것을 듣는다는 것은 내 머릿속에 없는 힌트들을 얻는 것이고, 타인의 눈-머리와 나의 눈-머리를 연결해보는 훈련이 됩니다. 다른 사람이 왜 그런 반응을 주는지, 다른 사람이 느끼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를 고민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많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좋은 피드백을 얻기 위해서 좋은 선생님을 만나는 것도 방법이고, 좋은 그림친구를 만나는 것도 방법이며, 그림사이트에 올려서 조언을 구하거나, 그림방송 혹은 스터디 그룹에서 주기적으로 그림을 보여주고 피드백을 얻는 것도 방법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블로그에 그림을 올리고 남겨진 댓글을 보는 것도 방법이고요.

간혹 ‘저는 사람들한테 그림 보여주기 싫어요’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피드백을 더 충실하게 해주어야 하고, 사람들을 대신해서 미처 내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채워줄 존재들을 더 열심히 찾으셔야 합니다. 좋은 교재를 찾거나, 외국의 그림 관련 강의를 찾아서 이해하거나, 내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의 좋은 예시가 되는 작가님들을 찾거나 하는 방법도 있겠네요. 또 자신의 작업을 끝날 때마다 처음 보는 그림처럼 낯설게 바라보는 시간을 자주 가져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① 인터넷 커뮤니티 활용하기

저의 경우, 네이버 카페 '방사'와 '게그'에서 활동했습니다.

아주 초기에 너무나도 막연해서 하소연하는 글을 적기도 했고, 작은 성과라도 있으면 부끄럼도 없이 그림을 보여드리기도 했습니다. 혹평도 있고, 근거없는 비방도 있고, 가끔은 지금까지도 숙제처럼 남겨진 좋은 조언들도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의 그림을 보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그림에 접근하고 있는지 많은 단서들을 얻기도 합니다.


요즘은 아트스테이션 같은 아트웍을 공유하는 좋은 사이트들도 많습니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같은 SNS를 통해 소통하는 방법도 있고요. 국내 뿐만이 아니라 국외의 좋은 작업자들과 만나고 피드백을 주고 받는다면 그림 세계가 조금은 더 넓어지지 않을까 합니다.


② 인터넷 그림방송 하기

저는 취준생 시절에 아프리카에서 그림방송을 진행했습니다.

남에게 작업과정을 보여주기엔 실력이 한참 부족한 것을 알고 있지만, 그림방송을 켜는 동안에는 다른 짓을 하지 않는데다 최대한 쪽팔리지 않기 위해 전력을 다 하게 된 덕분에 최고의 집중력을 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오가는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서 힌트를 얻기도 하고, 가끔 누군가 어떻게 그리냐고 물어보면 새삼 그 원리를 되짚어보면서 다시 공부를 하게 되기도 했습니다. 

가끔은 아주 유명한 작가님들이 들어오셔서 인사를 주시기도 하고, 조언을 해주시기도 했습니다. 인터넷의 위대함을 느꼈던 순간들이네요.


요즘은 모니터를 공유하는 구글의 '행아웃'서비스가 생겨서, 아예 낯선 사람이 아닌 자신이 아는 지인들과 서로의 과정을 공유하기도 하는 것으로 압니다. 도움을 받을 수만 있다면 매체의 형태는 상관없을 것 같습니다.


③ 경력자분과 피드백을 주고 받으며 그림 그려보기

아주 초기에 제가 게임 컨셉에 대한 아무런 개념조차 없을 때였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게그라는 사이트에서 도움을 주겠다 하시는 고마운 은인 한 분을 만났고, 그 분과의 피드백을 주고 받으며 캐릭터 디자인을 한 장 진행해보았습니다. 


제가 러프하게 잡은 디자인을 시작으로 그 분이 문제되는 부분을 지적하시면, 제가 그에 대해 보강하는 시안을 잡아서 보여드리고, 그에 대한 피드백을 반복하는 식이었습니다. 이때의 경험을 거친 뒤부터는 스스로 작업을 점검할 때에도 어떤 질문들을 해야 하는지 많은 힌트를 얻을 수 있었고, 막연하게나마 게임 원화 작업을 진행할 때의 흐름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특정 사람과 직접적으로 주고 받는 피드백은 상대적으로 보다 더 구체적이라는 장점이 있습니다. 상대방도 좀더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설명하게 되고요. 그림동지, 지인, 학원 선생님 등 활용할 수 있는 사람들을 모두 동원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해당 그림 링크: http://sunmeism.com/83 )


④ 회사작업

사실 회사작업은 여러 사람과의 공동작업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의 피드백이 일상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기획자, AD, 파트장, 동료작업자, 일러스트의 경우 유저분들까지 광범위하고 다양한 반응을 만나게 되죠. 


회사에서 작업을 한다는 것은 돈을 받고 그 이상의 가치를 만들어내는 프로 작업자라는 얘기가 됩니다. 가깝게는 상사 혹은 이 직군과 상관없는 사람들의 피드백까지도 반영해야 하는 순간은 꼭 생깁니다. 반드시 체크해야 하는 것은 상대방이 어떤 말을 '왜'하게 되는지 입니다. 좋은 반응이라면 상관없겠지만, 가끔은 가혹할 만큼 부정적인 반응이 올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 말을 내뱉은 상대방은 자신이 왜 그렇게 느끼는지 설명하지 못 하는 경우도 많죠. 어찌보면 당연합니다. 그 사람들은 시각적인 것들에 대해서 전문적인 공부를 한 사람들이 아니거든요. 왜 그렇게 느끼는지 분석하고, 해결 할지 말지를 결정하고, 해결방법을 제시해야하는 것은 그림을 다루고 프로로서 돈을 받는 사람의 몫입니다. 불평하면 무조건 해결해줘야 한다-가 아닙니다. 분석해보시고 무시해도 되는 피드백이라면 확실한 사유를 알려주고 설득하시면 됩니다. 내가 놓쳤던 부분이거나, 프로젝트 상으로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라면 해결방안을 제시하면 됩니다. 

피드백 과정에서 받는 부담감을 조금 떨쳐내고 나면, 내 머릿속이 아닌 다른 사람의 머릿속을 들여다 보는 경험은 내가 성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여러분도 이 과정의 즐거움을 느끼시게 된다면 참 기쁠 것 같습니다.



저는 이렇게 위의 개념들을 기준으로 일정주기마다 돌아가면서 훈련하거나, 각 훈련마다 구체적인 목표를 조금씩 달리해서 반복하기도 했습니다.(5번은 훈련이라기에는 조금 애매하긴 하지만, 꾸준한 발전을 위해서 필요한 요소라고 생각해서 함께 설명합니다.) 일단 그림을 그려보시고 자신에게서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 살펴본 뒤 빠르게 그것을 채울 수 있는 훈련법을 찾아 연습을 반복한다면, 무엇이 되었든 좋은 훈련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예 막막하신 분들을 위한 소개였으니, 본인에게 맞는 부분이 있다면 적절히 활용하시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언제나 자기 자신을 믿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스스로의 눈과 판단을 믿고, 각자의 모양대로 그림 그려나가시길 기원합니다:)

 

혹시 궁금한 점 있으시다면 댓글이나 방명록에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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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 TOO #WITH YOU_가해자에게 말합니다.

 

페이스북에서 가해자를 이미 차단한 상태였는데 페이지로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글을 블로그에 올린 시각이 20:53이었는데, 00:01에 처음 메시지를 보내주셨네요. 언젠가는 돌고 돌아 당신께도 읽힐지 모르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 즉각적으로 대응하셔서 많이, 아주 많이 놀랐습니다. 이 글도 금방 읽어주시리라 믿습니다.

 


제가 당신을 매장 할까봐 걱정하시는 것 같은데, 제가 당신을 매장시켜서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만약 당신을 매장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아주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글을 썼을 테고, 최대한 이슈가 되도록 온갖 자극적인 단어를 모두 가져다 썼을 겁니다. 당신을 추정할 수 있는 단서들을 글 곳곳에 최대한 꼼꼼하고 치밀하게, 실수인 척 배치했을 겁니다. 더 많은 공감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라면 조금 더 감정적에 치우친 편도 좋았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그 글을 쓰는 2주동안 당신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가리고 감추는데 주력했습니다. 당신에 대해 추측하지 못하도록 직장 / 시간 / 실명 / 직급에 대한 언급 모두 최대한 뭉뚱그려 썼습니다. 제 글은 당신을 끌어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 그리고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분들을 응원하기 위해서 썼을 뿐입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 입니다.


오히려 저는 제가 안 좋은 시선을 받을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어 없는 얘기는 사람들의 귀에 가닿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저를 밝히지 않을 수 없었고, 저와 동명이인인 원화가분을 알고 있기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저의 아트웍을 올리는 공간에 글을 올렸습니다.


제가 살면서 가진 몇 안 되는 행복은 그림입니다. 몸이 아프고, 여러 번의 수술을 거치면서 언제까지 살 수 있을지에 대한 많은 고민을 했고, 제가 이번 생에 세상에 남길 수 있는게 뭘까 많이 고민해왔습니다. 제가 세상에 태어나 저의 소명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비록 가상의 존재들일지라도 가장 알맞은 시간, 가장 알맞은 장소, 가장 알맞은 쓰임새와 형태에 맞춰 디자인하고 그들이 영원히 살아 숨쉬게 하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저도 그렇게 존재하고 싶은 것처럼요.


그런 제가 그 글을 쓰기 위해 저의 가장 소중한 작업, 아트웍에 붙여질 성희롱 피해자라는 낙인을 감수했습니다. 당신은 제가 당신을 매장시킬까봐 걱정되겠지만, 반대로 당신이 저를 매장시키는 것이 더 쉽습니다. 전 이미 드러나있으니까요.


당신은 저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당신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부자가 되든 다른 무엇을 하든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당신이 꼭 성공해 보이겠다는 말에 그러시라 했던 이유는 당신이 성공해서 나와 전혀 상관없는 공간에서 나를 떠올릴 일 없이 잘 지낼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겠다 싶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성공한다고 해서 제가 배 아프지도, 당신이 실패한다고 해서 즐거워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제가 어떤 사람으로 존재하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당신이 보낸 메시지에 대해서 하나 하나 따져가며 반박하진 않겠습니다. 반박해야 할 부분들은 너무 많지만, 그러다 보면 부득이하게 당신에 대한 정보 혹은 당신과 나 이외의 주변인들에 대해서까지 언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제가 원하는 것이 아니고, 당신이 원하는 바도 아니리라고 믿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명확합니다. 당신이 잊혀지기를 원합니다. 더 이상 내 삶을 침범하지 말아주었으면 합니다. 당신이 잊혀지는 한 저는 당신의 실명을 말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의 사과, 속죄, 해명, 변명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저에게 설명하거나, 저를 설득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저에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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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 TOO #WITH YOU

 

#ME TOO


살면서 나에게 성희롱으로 인한 고통이 어떤 형태로 얼마나 오래 유지되는지에 대해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었다. 생각해보면, 어떤 비극적인 일들도 사건 사고의 종결과 함께 서술이 끝나기 마련이고 그 이후에 이어진 피해자의 삶은 관심에서 멀어진다. 피해자의 삶은 이어짐에도 불구하고.


같은 성희롱 피해자가 나에게 말했다. “왜 자꾸 자신을 피해자로 남겨두냐. 그러게요, 이 별 것 아닌 일이 도대체 얼마나 날 흔들어댈 셈일까요? 왜 전 떨쳐내지 못하는 걸까요? 내가 피해자인 기분이 좋아서? 사람들이 동정하는 눈빛을 즐겨서? 내가 계속 피해자여야만 가해자를 비난할 수 있고, 비참할수록 더 크게 비난할 수 있으니까?


장담하건대, 제 발로 늪으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은 없다. 단단한 대지에 서있는 사람들의 눈에 허우적대는 내가 의아해 보여도, 나는 빠져나갈 방법을 모를 뿐 즐기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 곳에 갇힌 것뿐이다.


세상의 모든 충돌은 흔적을 남긴다. 모든 상처는 흉터로 남는다. 그리고 나에게도 흉터가 하나 있다.


성희롱을 겪은 지도 한참 지났고, 더 없이 행복한 상태였다. 어느 때보다 원하는 아트웍의 형태에 가까워졌기에 자신감도 붙었고, 좋은 동료와 나를 믿고 지지해주는 남편- 이보다 더 행복할 순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해자는 불쑥 연락을 해왔다. “성공하면 밥 한끼 사겠다는 약속 지키려고 연락했어요.” 난 거듭 거절했던 일방적인 약속이었다. 나에게 없는 사람이 되어야 했던 그는 언제든 내 삶에 끼어들 수 있었고, 메시지 한 줄에 나를 무너뜨릴 수 있었다. 겨우 회복되었던 타인에 대한 불신과 비정상적인 스트레스 반응이 연쇄작용을 일으켰고, 나를 정치적 인물로 보는 직장동료의 눈빛 하나에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고 오열하며 무너져 내렸다. 직장동료는 무슨 죄가 있을까, 입장차이였을 뿐인데. 나는 다른 몇 가지 이유와 더불어 다니던 회사를 퇴사하기로 결정했고,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나를 가려야만 했기에 유일한 도피처였던 페이스북도 정리했다.


나는 다시 내 상처와 마주해야 한다. 가해자와 완전히 분리되지 못한다는 걸 알았으니, 시간에게만 맡겨둘 순 없었다. 또 내 삶이 휘둘리게 놔둘 순 없다. 나는 그 사건을 다시 마주봐야 했다.

 

 

가해자가 처음 언어적 성희롱을 한 날, 나는 그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나의 외모를 칭찬한 직후 이어진 최근 와이프와 성관계가 없다는 사실의 나열에 나는 진지하게 상담을 해주었을 뿐이다. 만약 피해자가 성적으로 수치심을 느껴야 성희롱이 성립된다면, 엄밀히 말해서 가해자는 그 날 나에게 성희롱을 하지 않았다.


문제는 가해자의 불안이었다. 가해자는 바로 다음날 탕비실로 불러 입구를 몸으로 막은 뒤 말실수를 한 것 같다’ ‘내가 책잡힐 말을 한 것 같다는 말을 반복했다. 만약 그의 말대로 말실수였다면 그냥 사과 한마디로도 충분했다. 아니면 내가 그 날 일을 떠올리지 않도록 잊은 척 했어야 했다. ‘어제 대화는 단순한 상담이었다고 내가 정리했음에도 가해자는 끊임없이 내가 말을 옮길까 걱정했고, 그제야 나는 그 의도가 단순한 상담이 아니었음을 확신했다.


그 날부터 가해자는 끊임없이 나를 고립시켰다. 주변 동료들과 대화를 나눌 낌새라도 보이면 몸으로 그 사이를 가르며 막곤 했고, 업무 컨펌을 위해 상사를 찾을 땐 항상 상사들을 데리고 담배피러 가자거나 옥상에 쉬러 가자며 사라지는 그가 있었다. 가해자가 한 가장 나쁜 짓은 이것이었다. 이미 오랜 시간 함께 일해온 사람들 무리와 나 사이에 선을 그었고, 나는 가해자와 즐겁게 웃는 직장동료들 사이에서 그가 아닌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을 구분할 수 없었다. 가해자 수십 명으로 둘러싸인 공간에 오로지 혼자인 기분이었다.


나는 입을 다물기로 했다. 아니, 가해자가 그렇게 만들었다. 나는 체념한 채로, 그의 불안이 충분히 가라앉고 나면 없던 일이 되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러나 다른 동료와 내 사이를 어김없이 몸을 들이밀어 막아서던 그 어느 날엔가, 가해자는 평범했던 내 반팔티 위로 내 가슴골을 끈질기게 곁눈질로 내려다보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고개를 돌리고 확인을 하는 동안에도 그의 시선은 떨어질 기미조차 없었고, 그렇게 없었던 일이 되리라는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입은 이미 다물기로 했고, 고립은 계속 되었고, 구조신호를 주고 받을 수 없는 내가 달리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아무 생각 없이 일하는 중에도 흐르는 눈물은 내가 정상이 아님을 알렸고, 이성적인 사고와 치닫는 감정과 내 표정-몸짓은 분리되어버린 채로 고장이 나버렸다. 비정상적인 스트레스 반응이었다. 공간에 갇힌 기분이 들 때면 숨을 쉬기가 어려워 지갑이고 폰이고 두고 뛰쳐나가 체력이 하나도 남지 않을 때까지 몇 시간이고 걸어야만 했고, 걷고 걷다가 실신해서 119대원과 마주하기도 했다. 당시 남자친구였던 내 남편에게 이해 받지 못한다는 기분이 들 때면 길거리든 어디든 짐승 같이 울부짖으며 물건을 부수고 실신하기도 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괴물 같은 모습을 내보이고서 옆에서 볼 때 제정신이 아닌 것 같으면 정신병원에 입원시켜달라고 부탁해야 했던 내 기분을 누가 알 수 있을까.


삶의 가장 비극적인 부분은 등장인물이 아무리 힘들거나 도망치고 싶어도 어김없이 이어진다는 점이다. 나는 그런 와중에도 돈을 벌어야 했기에 정상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신경정신과 상담을 받고 약을 처방 받아 먹었다. 솔직히 말하면 상담은 전혀 소용이 없었다. 의사는 돈을 받고 환자의 말을 들어주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지만, 의사의 결론은 항상 기승전-부모잘못어릴적의 트라우마였으니 내 말을 전혀 들을 생각이 없는 건 확실했다. 세상 모든 의사가 이렇진 않을 테니 운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상담 5분만에 처방 받을 수 있었던 약은 심적 고통에 둔감해지게 해주었고, 괜찮아졌다고 착각했다. 그래서 나중에 퇴사하면 쉬면서 나를 고치려 모아둔 돈은 집이 어렵단 말에 가져다 드렸고, 상황이나 스스로를 감당할 수 없어도 출근을 하고, 가해자의 얼굴을 마주하고, 밥을 먹고, 삶을 유지했다. 도망칠 곳이 보이지 않아 버티는 것 외의 선택지를 알지 못했다.


끝은 예상치 못하게 이뤄졌다. 세상엔 나를 늪에 밀어 넣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늪인지도 모르고 있는 나를 끄집어내는 사람도 있었다. 직장상사는 내가 회사생활에 문제없이 적응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면담자리를 만들었다. 가해자가 내 회사생활의 적응을 돕던 멘토였기에 자연스레 가해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나는 그냥 이미 지난 일이라며 남 일처럼 말했다. 나 하나 참으면 되는 일인데요, 난 괜찮아요- 그러자 상사가 나에게 말했다.


네가 회사를 위해 희생한다고 해서 회사가 그에 합당한 보상이란 것을 해줄 수도 없을뿐더러, 그런 것을 요구하는 회사라면 네가 다닐 필요도 없다.”


우습게도 나는 내가 괜찮지 않다는 것도, 나에게 남은 선택지가 있다는 것도, 참을 이유가 없다는 것도 그 말을 듣고서야 알았다. 듣자마자 깨달았다. 구원이었다.


직장상사는 말로만 그치지 않았다. 직장 내에서 다른 피해자는 없는지 조사했고, 나도 용기내서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사실을 알렸다. 가해자는 퇴사권고 처리되었다. 때론 지극히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것이 가장 큰 구원이 되고, 그때의 나에게도 그랬다.

 


상황이 종료되었지만, 나의 정신과 마음은 이미 망가져있었다. 나는 스스로의 감정을 알지 못했고, 그것을 소리내어 말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주변인들의 판단에 의지했다. 나는 주변인들의 시선으로 정의되었다.


누군가는 나의 피해사실이 알려지면 가해자의 실력이 평가절하되지 않을까걱정했다. 그래서 나는 실력이 정당하게 평가받아야 할 무고한 가해자를 공격한 사람이 되었다. 또는 나의 피해사실은 가해자의 실력평가에 조금의 영향조차 끼칠 수 없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다. 누군가는 망설이다 밝힌 나의 피해사실을 듣고서 그 분 좋은 분이던데라며 그와 어울리는 수많은 능력 있고 훌륭한 사람들을 하나 하나 손꼽아 나열했다. 나는 훌륭한 사람을 친구로 둔 좋은 사람을 모함한 셈이었다. 그리고 나는 가해자보다 훌륭하지도 좋지도 않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다. 누군가는 나에게 어떤 의도를 가지고 말한게 아니냐고 했다. 나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성희롱 피해사실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가해자를 깎아내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성희롱 피해사실을 밝히거나 혹은 자발적으로 당한 사람이 되었다. 주변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난 그런 사람이었다.


시선은 감옥이 되었다. 처음에 내 입을 다물게 한 것은 가해자였지만, 그 상황이 끝나고도 지금까지 내 입을 틀어막은 것은 주변사람들의 그 말들이었다.


억울했다. 하지만 다시 고립되고 싶지 않았다. 주변인들은 피해자인 내 편도 들기도 했지만, 가해자의 변호도 해주었고 염려해주었다. 나는 가해자보다 더 쓸모 있고, 그들이 좋아할 만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나는 누구의 이득도 해치지 않는 무해한 사람이 되어야 했다. 나에게 파트장이나 AD같은 더 높은 자리를 욕심내는게 아니냐고 하는 사람을 만나면, 이 기분이 정상적이지 않은 것은 알지만, 나는 마치 정말로 성희롱 피해사실마저도 이득을 위해 이용하는 사람인 것을 인정하는 것만 같았다. 그런 끔찍한 기분이 싫어서 아무도 원하지 않는 자리만 마지못해 맡았다. 더 위를 노려보라 조언하는 사람을 만나면 도망쳤다. 윗자리는 정말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대부분이 코웃음 쳤다. 누군들 높은 자리를 원하지 않겠느냐-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옥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찾았다.


나의 행동에는 치명적인 오류가 있었다. 난 될 수 없는 존재가 되려고 했다. 애초에 주변인들은 각자 보고 싶은 대로 볼 뿐이었고, 여러 가지 기준에 동시에 나를 맞춘다는 건 불가능했다. 정치적인 것이 나쁜 것도 아니고, 내가 무엇을 원하고 욕망하는 것이 잘못인 것도 아니었다. 나는 오로지 내가 한 일에 의해서만 정의되어야 했다. 내가 잘못한게 있다면 응당 용서를 빌고 바로잡아야 하지만, 잘못한게 없는데 잘못을 빌고 나를 고치려 들 필요는 없었다.


나는 그동안 주변인들이 아무런 악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잘잘못을 따질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틀렸다. 악의가 없어도 상처를 낼 수 있고, 그때 그 사람들은 나에게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였다. 그 말들은 틀렸고,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퇴사권고가 이뤄지고 가해자는 나에게 메신저를 통해 사과란 것을 해왔고, 질질 끄는 대화를 끝내기 위해 나는 그가 원하는 말을 읊었다. ‘말하고 다니지 않겠다고도사과를 받아들이겠다고도 했다. 그 대화를 끝으로 영원히 볼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기에 할 수 있었던 말이었다.


가해자도 쪽팔림은 알 테니 왜 퇴사했냐는 질문에 꿈을 위해서라거나 더 큰 목표를 위해서라고 답했다는 말을 들어도 그러려니 했다. 그러나 가해자는 퇴사 이후 회사 안팎으로 상사가 부당하게 자신을 자른 것처럼 모함했다. 상사는 자신의 억울함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가해자의 성희롱 가해 사실뿐만 아니라 나의 피해 사실도 언급할 필요가 있었다. 상사는 해명하지 않았다.


원래 저 사람이 그 사람 싫어했잖아모든 것은 그 한마디로 정리됐고, 사람들은 아무 의심 없이 그 말을 주워섬기곤 했다.


가해자는 자기 입으로 퇴사가 부당하다고 말하고 다니지 말았어야 했다. 그는 잘못을 인정하더라도 퇴사권고를 받을 만큼의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한 거였다. 정말로 미안했다면 나를 위해 정당한 조치를 취한 상사를 모함하지 말았어야 했고, 나를 그에게 고개도 못 들 죄인으로 만들지는 말았어야 했다. 꿈을 위해서 나갔다는 소릴 할 거면, 적어도 당신 자신을 위해서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어야지. 왜 당신은 항상 최악의 선택을 하는 걸까.


가해자는 사과 한마디로 끝낼 수 있는 상황도 입막음을 시도해서 상황을 악화시켰고, 입막음을 실패하자 최소한의 투자로 사과를 하고 가장 효율적으로 내 입을 다물게 했다. 자신의 퇴사가 부당하다며 오히려 피해자인 척 하고 다녔고, 기어이 자신의 조그마한 죄인 딱지마저 피해자인 내 손으로 떼어주길 바라며 연락을 해왔다.


난 정말로 궁금한 것이 있다. 당신은 당신이 일방적으로 했던 그 약속만 기억하는 것 같은데, 난 분명 그 약속을 거절했다. 대신 당부의 말을 했었다. 절대, 다른 사람에게 나와 똑같은 짓은 하지 말아달라고. 당신이 이 부탁을 기억하고 있는지, 그리고 지키고 있는지 진심으로 궁금하다.

 


과거의 일을 되새기며 오랫동안 글을 쓰고 지웠다. 울기도 많이 울었고, 잘못 맞춰진 단추는 처음부터 다시 맞춰야만 했다. 그래도 몇 년만에 이제야 비로소 숨쉬는 것 같다. 적어도 지금의 나에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눈에 보이니까.


나도 내가 어떤 상처를 입었는지 지금에서야 정확히 알게 됐으니, 그때의 가해자가 진심으로 뉘우치고 사과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 글을 수십 번 읽는다고 해서 가해자가 내 고통을 이해하리라는 기대도 하지 않으며, 가해자의 사과를 원하지도 않는다.


지난 시간 동안 날 구해준 직장상사와 사랑하는 나의 남편은 나에게 그 누구보다 많은 사과를 해주었다. 상사는 늘 자신이 좀 더 일찍 가해자를 막아주지 못한 것을 후회했고, 남편은 그때의 내 아픔을 더 잘 이해해주지 못한 것을 미안해했다. 나는 그런 상사에게 죄인이었고, 남편에게는 아픔이었다. 그들은 나에게 사과할 필요도, 서로가 미안해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 서로를 위로하고 치유해왔다. 그러니 가해자의 사과, 속죄, 변명 그 어떤 것도 나에겐 필요 없다.

 

나는 이제 늪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이겨내고 살아가기 위해 선언한다.


나는 이제 내 감정들에게 이름을 붙일 수 있고, 타인의 시선으로 정의되지 않을 것이며, 오로지 내가 한 일들을 책임지고 감당하며 살아가겠다. 그리고 다시는 가해자가 내 삶에 발 디디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가해자가 오래도록 나에게 강요했던 일, 고립되고 입다무는 것- 그것들에 최선을 다해 저항할 것이다.


나는 이제 나를 피해자로 남겨두지 않을 것이다.

 





#WITH YOU


누군가는 저처럼 끝난 일임에도 품고 있을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현재 진행중인 일일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아픔과 똑같진 않아도 꼭 닮은 아픔을 품은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딘가에는 있다는 사실을 꼭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온 세상에 혼자인 것만 같았던 옛날의 저에게도요.


사건이 끝났음에도 아픔이 끝나지 않았던 지난 몇 년 동안, 저는 스스로를 계속해서 괴롭혔습니다. 입을 다물기로 결정했던 비겁한 저를 증오했고, 그 날 하필 가해자와 함께 있고 함께 대화를 나눈 저를 책망했고, 그에게 욕 한 번 내지르지 못한 것을 후회했습니다. 그러나 저도 미투운동을 보면서 이제와 깨달았습니다. 잘못을 한 것은 그인데, 나는 왜 그가 아닌 나를 미워하고 있었던 걸까요? 이 아픔과 관련해서 모든 질문들은 가해자를 향해야 하는데 나는 그 질문들을 나에게 하고, 나를 질책하고 있었습니다. 정확하게는 내가 입을 다물기로 한 것이 아니라 그가 입을 다물게 만든 것이었고, 그 날 나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은 가해자였으며, 나는 그에게 욕 한번 내지르지 못했을 만큼 가해자에게 겁을 먹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내가 성희롱을 당하겠다고 결정한 것이 아니라, 가해자가 성희롱을 하겠다고 결정한 것입니다. 절대 자기 자신을 미워하지 말아주세요. 당신은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저의 구원자이자 조력자였던 상사가 저에게 해준 말을 꼭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네가 회사를 위해 희생한다고 해서 회사가 그에 합당한 보상이란 것을 해줄 수도 없을뿐더러, 그런 것을 요구하는 회사라면 네가 다닐 필요도 없다.”


기억해주셨으면 합니다. 당신이 느껴야 할 행복과 안전함은 당신의 희생 위에 세워질 가해자와 타인의 평화보다 덜 중요하거나, 가치 없는 것이 아닙니다. 회사가 아닌 가족, 학교, 사회 등 다른 단어로 바뀌어도 마찬가지 입니다. 누군가 당신에게 입을 다물어야 한다거나, 참아야 한다거나, 당신이 희생해야 하는 것들을 별 것 아닌 것처럼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분명히 말해주세요, “당신이 틀렸다. 그리고 만약 정말로 현실적 어려움 때문에 입을 다물고자 결심하셨다면, 꼭 기억해주세요. 당신은 스스로 입을 다물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입을 다물게 한 것임을. 비겁한 것은 내가 아니라 그들임을. 정말로 용기가 생기실 때 그 때 꼭 말해주세요.


일이 끝나고도 어쩌면 당신의 악몽은 끝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처음에는 아무렇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당신은 그 감정이 무엇인지 몰라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거고요. 하지만, 감정의 이름을 모른다고 해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른 척 하거나, 건드리지 않아도 됩니다. 다 나을 때까지, 혹은 열어볼 마음이 생길 때까지 내버려두셔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어딘가 문제가 있다고 느껴지거나, 용기가 생길 쯤에 그때쯤에 한번쯤 마주하셨음 좋겠습니다. 그리고 간혹 잘못 아문 흉터를 보면서, 자신이 원래부터 잘못된 존재라거나 태어날 때부터 괴물이었던 것처럼 착각하지 않으셨음 좋겠습니다. 잘못 아문 흉터 또한 당신이 필사적으로 살아남으려고 했다는 증거입니다. 당신이 스스로를 치유하려고 할 만큼 강하다는 증거입니다. 당신이 원할 때 그것들은 얼마든지 제 형태를 찾아갈 것이고, 제 흉터 또한 그럴 거라고 믿습니다


당신은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언제나 당신과 함께 하고, 응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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