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 TOO #WITH YOU

 

#ME TOO


살면서 나에게 성희롱으로 인한 고통이 어떤 형태로 얼마나 오래 유지되는지에 대해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었다. 생각해보면, 어떤 비극적인 일들도 사건 사고의 종결과 함께 서술이 끝나기 마련이고 그 이후에 이어진 피해자의 삶은 관심에서 멀어진다. 피해자의 삶은 이어짐에도 불구하고.


같은 성희롱 피해자가 나에게 말했다. “왜 자꾸 자신을 피해자로 남겨두냐. 그러게요, 이 별 것 아닌 일이 도대체 얼마나 날 흔들어댈 셈일까요? 왜 전 떨쳐내지 못하는 걸까요? 내가 피해자인 기분이 좋아서? 사람들이 동정하는 눈빛을 즐겨서? 내가 계속 피해자여야만 가해자를 비난할 수 있고, 비참할수록 더 크게 비난할 수 있으니까?


장담하건대, 제 발로 늪으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은 없다. 단단한 대지에 서있는 사람들의 눈에 허우적대는 내가 의아해 보여도, 나는 빠져나갈 방법을 모를 뿐 즐기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 곳에 갇힌 것뿐이다.


세상의 모든 충돌은 흔적을 남긴다. 모든 상처는 흉터로 남는다. 그리고 나에게도 흉터가 하나 있다.


성희롱을 겪은 지도 한참 지났고, 더 없이 행복한 상태였다. 어느 때보다 원하는 아트웍의 형태에 가까워졌기에 자신감도 붙었고, 좋은 동료와 나를 믿고 지지해주는 남편- 이보다 더 행복할 순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해자는 불쑥 연락을 해왔다. “성공하면 밥 한끼 사겠다는 약속 지키려고 연락했어요.” 난 거듭 거절했던 일방적인 약속이었다. 나에게 없는 사람이 되어야 했던 그는 언제든 내 삶에 끼어들 수 있었고, 메시지 한 줄에 나를 무너뜨릴 수 있었다. 겨우 회복되었던 타인에 대한 불신과 비정상적인 스트레스 반응이 연쇄작용을 일으켰고, 나를 정치적 인물로 보는 직장동료의 눈빛 하나에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고 오열하며 무너져 내렸다. 직장동료는 무슨 죄가 있을까, 입장차이였을 뿐인데. 나는 다른 몇 가지 이유와 더불어 다니던 회사를 퇴사하기로 결정했고,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나를 가려야만 했기에 유일한 도피처였던 페이스북도 정리했다.


나는 다시 내 상처와 마주해야 한다. 가해자와 완전히 분리되지 못한다는 걸 알았으니, 시간에게만 맡겨둘 순 없었다. 또 내 삶이 휘둘리게 놔둘 순 없다. 나는 그 사건을 다시 마주봐야 했다.

 

 

가해자가 처음 언어적 성희롱을 한 날, 나는 그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나의 외모를 칭찬한 직후 이어진 최근 와이프와 성관계가 없다는 사실의 나열에 나는 진지하게 상담을 해주었을 뿐이다. 만약 피해자가 성적으로 수치심을 느껴야 성희롱이 성립된다면, 엄밀히 말해서 가해자는 그 날 나에게 성희롱을 하지 않았다.


문제는 가해자의 불안이었다. 가해자는 바로 다음날 탕비실로 불러 입구를 몸으로 막은 뒤 말실수를 한 것 같다’ ‘내가 책잡힐 말을 한 것 같다는 말을 반복했다. 만약 그의 말대로 말실수였다면 그냥 사과 한마디로도 충분했다. 아니면 내가 그 날 일을 떠올리지 않도록 잊은 척 했어야 했다. ‘어제 대화는 단순한 상담이었다고 내가 정리했음에도 가해자는 끊임없이 내가 말을 옮길까 걱정했고, 그제야 나는 그 의도가 단순한 상담이 아니었음을 확신했다.


그 날부터 가해자는 끊임없이 나를 고립시켰다. 주변 동료들과 대화를 나눌 낌새라도 보이면 몸으로 그 사이를 가르며 막곤 했고, 업무 컨펌을 위해 상사를 찾을 땐 항상 상사들을 데리고 담배피러 가자거나 옥상에 쉬러 가자며 사라지는 그가 있었다. 가해자가 한 가장 나쁜 짓은 이것이었다. 이미 오랜 시간 함께 일해온 사람들 무리와 나 사이에 선을 그었고, 나는 가해자와 즐겁게 웃는 직장동료들 사이에서 그가 아닌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을 구분할 수 없었다. 가해자 수십 명으로 둘러싸인 공간에 오로지 혼자인 기분이었다.


나는 입을 다물기로 했다. 아니, 가해자가 그렇게 만들었다. 나는 체념한 채로, 그의 불안이 충분히 가라앉고 나면 없던 일이 되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러나 다른 동료와 내 사이를 어김없이 몸을 들이밀어 막아서던 그 어느 날엔가, 가해자는 평범했던 내 반팔티 위로 내 가슴골을 끈질기게 곁눈질로 내려다보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고개를 돌리고 확인을 하는 동안에도 그의 시선은 떨어질 기미조차 없었고, 그렇게 없었던 일이 되리라는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입은 이미 다물기로 했고, 고립은 계속 되었고, 구조신호를 주고 받을 수 없는 내가 달리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아무 생각 없이 일하는 중에도 흐르는 눈물은 내가 정상이 아님을 알렸고, 이성적인 사고와 치닫는 감정과 내 표정-몸짓은 분리되어버린 채로 고장이 나버렸다. 비정상적인 스트레스 반응이었다. 공간에 갇힌 기분이 들 때면 숨을 쉬기가 어려워 지갑이고 폰이고 두고 뛰쳐나가 체력이 하나도 남지 않을 때까지 몇 시간이고 걸어야만 했고, 걷고 걷다가 실신해서 119대원과 마주하기도 했다. 당시 남자친구였던 내 남편에게 이해 받지 못한다는 기분이 들 때면 길거리든 어디든 짐승 같이 울부짖으며 물건을 부수고 실신하기도 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괴물 같은 모습을 내보이고서 옆에서 볼 때 제정신이 아닌 것 같으면 정신병원에 입원시켜달라고 부탁해야 했던 내 기분을 누가 알 수 있을까.


삶의 가장 비극적인 부분은 등장인물이 아무리 힘들거나 도망치고 싶어도 어김없이 이어진다는 점이다. 나는 그런 와중에도 돈을 벌어야 했기에 정상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신경정신과 상담을 받고 약을 처방 받아 먹었다. 솔직히 말하면 상담은 전혀 소용이 없었다. 의사는 돈을 받고 환자의 말을 들어주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지만, 의사의 결론은 항상 기승전-부모잘못어릴적의 트라우마였으니 내 말을 전혀 들을 생각이 없는 건 확실했다. 세상 모든 의사가 이렇진 않을 테니 운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상담 5분만에 처방 받을 수 있었던 약은 심적 고통에 둔감해지게 해주었고, 괜찮아졌다고 착각했다. 그래서 나중에 퇴사하면 쉬면서 나를 고치려 모아둔 돈은 집이 어렵단 말에 가져다 드렸고, 상황이나 스스로를 감당할 수 없어도 출근을 하고, 가해자의 얼굴을 마주하고, 밥을 먹고, 삶을 유지했다. 도망칠 곳이 보이지 않아 버티는 것 외의 선택지를 알지 못했다.


끝은 예상치 못하게 이뤄졌다. 세상엔 나를 늪에 밀어 넣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늪인지도 모르고 있는 나를 끄집어내는 사람도 있었다. 직장상사는 내가 회사생활에 문제없이 적응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면담자리를 만들었다. 가해자가 내 회사생활의 적응을 돕던 멘토였기에 자연스레 가해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나는 그냥 이미 지난 일이라며 남 일처럼 말했다. 나 하나 참으면 되는 일인데요, 난 괜찮아요- 그러자 상사가 나에게 말했다.


네가 회사를 위해 희생한다고 해서 회사가 그에 합당한 보상이란 것을 해줄 수도 없을뿐더러, 그런 것을 요구하는 회사라면 네가 다닐 필요도 없다.”


우습게도 나는 내가 괜찮지 않다는 것도, 나에게 남은 선택지가 있다는 것도, 참을 이유가 없다는 것도 그 말을 듣고서야 알았다. 듣자마자 깨달았다. 구원이었다.


직장상사는 말로만 그치지 않았다. 직장 내에서 다른 피해자는 없는지 조사했고, 나도 용기내서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사실을 알렸다. 가해자는 퇴사권고 처리되었다. 때론 지극히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것이 가장 큰 구원이 되고, 그때의 나에게도 그랬다.

 


상황이 종료되었지만, 나의 정신과 마음은 이미 망가져있었다. 나는 스스로의 감정을 알지 못했고, 그것을 소리내어 말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주변인들의 판단에 의지했다. 나는 주변인들의 시선으로 정의되었다.


누군가는 나의 피해사실이 알려지면 가해자의 실력이 평가절하되지 않을까걱정했다. 그래서 나는 실력이 정당하게 평가받아야 할 무고한 가해자를 공격한 사람이 되었다. 또는 나의 피해사실은 가해자의 실력평가에 조금의 영향조차 끼칠 수 없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다. 누군가는 망설이다 밝힌 나의 피해사실을 듣고서 그 분 좋은 분이던데라며 그와 어울리는 수많은 능력 있고 훌륭한 사람들을 하나 하나 손꼽아 나열했다. 나는 훌륭한 사람을 친구로 둔 좋은 사람을 모함한 셈이었다. 그리고 나는 가해자보다 훌륭하지도 좋지도 않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다. 누군가는 나에게 어떤 의도를 가지고 말한게 아니냐고 했다. 나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성희롱 피해사실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가해자를 깎아내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성희롱 피해사실을 밝히거나 혹은 자발적으로 당한 사람이 되었다. 주변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난 그런 사람이었다.


시선은 감옥이 되었다. 처음에 내 입을 다물게 한 것은 가해자였지만, 그 상황이 끝나고도 지금까지 내 입을 틀어막은 것은 주변사람들의 그 말들이었다.


억울했다. 하지만 다시 고립되고 싶지 않았다. 주변인들은 피해자인 내 편도 들기도 했지만, 가해자의 변호도 해주었고 염려해주었다. 나는 가해자보다 더 쓸모 있고, 그들이 좋아할 만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나는 누구의 이득도 해치지 않는 무해한 사람이 되어야 했다. 나에게 파트장이나 AD같은 더 높은 자리를 욕심내는게 아니냐고 하는 사람을 만나면, 이 기분이 정상적이지 않은 것은 알지만, 나는 마치 정말로 성희롱 피해사실마저도 이득을 위해 이용하는 사람인 것을 인정하는 것만 같았다. 그런 끔찍한 기분이 싫어서 아무도 원하지 않는 자리만 마지못해 맡았다. 더 위를 노려보라 조언하는 사람을 만나면 도망쳤다. 윗자리는 정말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대부분이 코웃음 쳤다. 누군들 높은 자리를 원하지 않겠느냐-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옥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찾았다.


나의 행동에는 치명적인 오류가 있었다. 난 될 수 없는 존재가 되려고 했다. 애초에 주변인들은 각자 보고 싶은 대로 볼 뿐이었고, 여러 가지 기준에 동시에 나를 맞춘다는 건 불가능했다. 정치적인 것이 나쁜 것도 아니고, 내가 무엇을 원하고 욕망하는 것이 잘못인 것도 아니었다. 나는 오로지 내가 한 일에 의해서만 정의되어야 했다. 내가 잘못한게 있다면 응당 용서를 빌고 바로잡아야 하지만, 잘못한게 없는데 잘못을 빌고 나를 고치려 들 필요는 없었다.


나는 그동안 주변인들이 아무런 악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잘잘못을 따질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틀렸다. 악의가 없어도 상처를 낼 수 있고, 그때 그 사람들은 나에게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였다. 그 말들은 틀렸고,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퇴사권고가 이뤄지고 가해자는 나에게 메신저를 통해 사과란 것을 해왔고, 질질 끄는 대화를 끝내기 위해 나는 그가 원하는 말을 읊었다. ‘말하고 다니지 않겠다고도사과를 받아들이겠다고도 했다. 그 대화를 끝으로 영원히 볼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기에 할 수 있었던 말이었다.


가해자도 쪽팔림은 알 테니 왜 퇴사했냐는 질문에 꿈을 위해서라거나 더 큰 목표를 위해서라고 답했다는 말을 들어도 그러려니 했다. 그러나 가해자는 퇴사 이후 회사 안팎으로 상사가 부당하게 자신을 자른 것처럼 모함했다. 상사는 자신의 억울함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가해자의 성희롱 가해 사실뿐만 아니라 나의 피해 사실도 언급할 필요가 있었다. 상사는 해명하지 않았다.


원래 저 사람이 그 사람 싫어했잖아모든 것은 그 한마디로 정리됐고, 사람들은 아무 의심 없이 그 말을 주워섬기곤 했다.


가해자는 자기 입으로 퇴사가 부당하다고 말하고 다니지 말았어야 했다. 그는 잘못을 인정하더라도 퇴사권고를 받을 만큼의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한 거였다. 정말로 미안했다면 나를 위해 정당한 조치를 취한 상사를 모함하지 말았어야 했고, 나를 그에게 고개도 못 들 죄인으로 만들지는 말았어야 했다. 꿈을 위해서 나갔다는 소릴 할 거면, 적어도 당신 자신을 위해서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어야지. 왜 당신은 항상 최악의 선택을 하는 걸까.


가해자는 사과 한마디로 끝낼 수 있는 상황도 입막음을 시도해서 상황을 악화시켰고, 입막음을 실패하자 최소한의 투자로 사과를 하고 가장 효율적으로 내 입을 다물게 했다. 자신의 퇴사가 부당하다며 오히려 피해자인 척 하고 다녔고, 기어이 자신의 조그마한 죄인 딱지마저 피해자인 내 손으로 떼어주길 바라며 연락을 해왔다.


난 정말로 궁금한 것이 있다. 당신은 당신이 일방적으로 했던 그 약속만 기억하는 것 같은데, 난 분명 그 약속을 거절했다. 대신 당부의 말을 했었다. 절대, 다른 사람에게 나와 똑같은 짓은 하지 말아달라고. 당신이 이 부탁을 기억하고 있는지, 그리고 지키고 있는지 진심으로 궁금하다.

 


과거의 일을 되새기며 오랫동안 글을 쓰고 지웠다. 울기도 많이 울었고, 잘못 맞춰진 단추는 처음부터 다시 맞춰야만 했다. 그래도 몇 년만에 이제야 비로소 숨쉬는 것 같다. 적어도 지금의 나에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눈에 보이니까.


나도 내가 어떤 상처를 입었는지 지금에서야 정확히 알게 됐으니, 그때의 가해자가 진심으로 뉘우치고 사과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 글을 수십 번 읽는다고 해서 가해자가 내 고통을 이해하리라는 기대도 하지 않으며, 가해자의 사과를 원하지도 않는다.


지난 시간 동안 날 구해준 직장상사와 사랑하는 나의 남편은 나에게 그 누구보다 많은 사과를 해주었다. 상사는 늘 자신이 좀 더 일찍 가해자를 막아주지 못한 것을 후회했고, 남편은 그때의 내 아픔을 더 잘 이해해주지 못한 것을 미안해했다. 나는 그런 상사에게 죄인이었고, 남편에게는 아픔이었다. 그들은 나에게 사과할 필요도, 서로가 미안해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 서로를 위로하고 치유해왔다. 그러니 가해자의 사과, 속죄, 변명 그 어떤 것도 나에겐 필요 없다.

 

나는 이제 늪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이겨내고 살아가기 위해 선언한다.


나는 이제 내 감정들에게 이름을 붙일 수 있고, 타인의 시선으로 정의되지 않을 것이며, 오로지 내가 한 일들을 책임지고 감당하며 살아가겠다. 그리고 다시는 가해자가 내 삶에 발 디디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가해자가 오래도록 나에게 강요했던 일, 고립되고 입다무는 것- 그것들에 최선을 다해 저항할 것이다.


나는 이제 나를 피해자로 남겨두지 않을 것이다.

 





#WITH YOU


누군가는 저처럼 끝난 일임에도 품고 있을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현재 진행중인 일일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아픔과 똑같진 않아도 꼭 닮은 아픔을 품은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딘가에는 있다는 사실을 꼭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온 세상에 혼자인 것만 같았던 옛날의 저에게도요.


사건이 끝났음에도 아픔이 끝나지 않았던 지난 몇 년 동안, 저는 스스로를 계속해서 괴롭혔습니다. 입을 다물기로 결정했던 비겁한 저를 증오했고, 그 날 하필 가해자와 함께 있고 함께 대화를 나눈 저를 책망했고, 그에게 욕 한 번 내지르지 못한 것을 후회했습니다. 그러나 저도 미투운동을 보면서 이제와 깨달았습니다. 잘못을 한 것은 그인데, 나는 왜 그가 아닌 나를 미워하고 있었던 걸까요? 이 아픔과 관련해서 모든 질문들은 가해자를 향해야 하는데 나는 그 질문들을 나에게 하고, 나를 질책하고 있었습니다. 정확하게는 내가 입을 다물기로 한 것이 아니라 그가 입을 다물게 만든 것이었고, 그 날 나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은 가해자였으며, 나는 그에게 욕 한번 내지르지 못했을 만큼 가해자에게 겁을 먹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내가 성희롱을 당하겠다고 결정한 것이 아니라, 가해자가 성희롱을 하겠다고 결정한 것입니다. 절대 자기 자신을 미워하지 말아주세요. 당신은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저의 구원자이자 조력자였던 상사가 저에게 해준 말을 꼭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네가 회사를 위해 희생한다고 해서 회사가 그에 합당한 보상이란 것을 해줄 수도 없을뿐더러, 그런 것을 요구하는 회사라면 네가 다닐 필요도 없다.”


기억해주셨으면 합니다. 당신이 느껴야 할 행복과 안전함은 당신의 희생 위에 세워질 가해자와 타인의 평화보다 덜 중요하거나, 가치 없는 것이 아닙니다. 회사가 아닌 가족, 학교, 사회 등 다른 단어로 바뀌어도 마찬가지 입니다. 누군가 당신에게 입을 다물어야 한다거나, 참아야 한다거나, 당신이 희생해야 하는 것들을 별 것 아닌 것처럼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분명히 말해주세요, “당신이 틀렸다. 그리고 만약 정말로 현실적 어려움 때문에 입을 다물고자 결심하셨다면, 꼭 기억해주세요. 당신은 스스로 입을 다물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입을 다물게 한 것임을. 비겁한 것은 내가 아니라 그들임을. 정말로 용기가 생기실 때 그 때 꼭 말해주세요.


일이 끝나고도 어쩌면 당신의 악몽은 끝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처음에는 아무렇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당신은 그 감정이 무엇인지 몰라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거고요. 하지만, 감정의 이름을 모른다고 해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른 척 하거나, 건드리지 않아도 됩니다. 다 나을 때까지, 혹은 열어볼 마음이 생길 때까지 내버려두셔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어딘가 문제가 있다고 느껴지거나, 용기가 생길 쯤에 그때쯤에 한번쯤 마주하셨음 좋겠습니다. 그리고 간혹 잘못 아문 흉터를 보면서, 자신이 원래부터 잘못된 존재라거나 태어날 때부터 괴물이었던 것처럼 착각하지 않으셨음 좋겠습니다. 잘못 아문 흉터 또한 당신이 필사적으로 살아남으려고 했다는 증거입니다. 당신이 스스로를 치유하려고 할 만큼 강하다는 증거입니다. 당신이 원할 때 그것들은 얼마든지 제 형태를 찾아갈 것이고, 제 흉터 또한 그럴 거라고 믿습니다


당신은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언제나 당신과 함께 하고, 응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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